찬란
이병률 시인의 찬란
시집을 읽으며 가장 와닿았고, 이유 없이 좋아고, 숨죽이며 읽었던 시 몇 가지를 써본다.
찬란
겨우나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않는 일은 더 찬란이리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불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은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언가 쑥 하고 몸에서 빠져나갈 때
스윽 할 때도 있고 흐응 할 때도 있고
굉장히 큰 것이 기관을 거치지 않고 맥없이
흘러나갈 때가 있단다
옷으로 스며들어 얼룩을 만들 때 있단다
열려 있는 문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가만히 앉은 등을 째고 속엣겟을 꺼내갈 것 같을 때
문짝만 한 바람이 내 등 뒤를 떠민 것뿐인데
등 전체가 흐느끼고 있음을 알 때도
실은 찔끔 혹은 호로록 새나가는 것이란다
바람에 천막이 열리고 닫힌 것뿐인데
그사이 기억조차 내가 그어놓은 막을 빠져나가버리면
허물만 두고 모두 끝나버리는 건 아닌가 싶단다
아찔하지만 그래도 괜찮단다
지나가는 것은 아픈 것이 아니란다
세상 모든 끝나버리는 것을 몰랐던 몸을 버리고
한 칸씩 한 칸씩
무수한 뒷날의 모두를 놓친 정신은
사방이 흰 방
그 뒷 방에 모여들어 똬리 틀고 안정한 한 시적을 지낸단다
진행의 세포
하루 한 개씩 도토리를 주웠다
그 가을이 다 몰려가기 전
몇 개의 도토리를 모을 수 있을까
계절과 내기했다
한 개의 도토리가
구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뒤로 물러서며
구멍 안에 어떤 세계가 들어 있을 거라 짐작했다
하루하루 세계는 가벼워졌다
도토리를 감싸고 있는 천막도
윤기를 잃어갔다
안에 누군가 살고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머리맡에 두고 잠든 날은
안에서 꿈벅꿈벅 하는 소리를 들었다
창백한 안감힘 같기도 하였다
몸이 불어 구멍을 빠져나오지 못하면 어쩌나
가엾기도 하였고
둥그런 가방이 아늑해 나오기 싫으면 어쩌나
부럽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물성도 수평을 고집하는 날엔
설핏 도토리가 굴렀다
그럴 때마다 칠십 리 칠십 리 소리를 들었다
도토리 안에 분명 겨울이 들어 있을 거였다
주머니에 넣고 걸으며 도토리가 손에 잡힐 때마다
칠십 리 칠십 리
나도 따라 걸었다.
시는 소설이나 다른 장르의 책들보다 좀 더 쉽게 읽히고 부담감이 없다. 그래서 내가 시를 좋아하는 이유이고 많이 읽는 이유다. 시를 읽으면 재미있는 표현, 감동적인 표현, 그리고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표현들이 간혹 등장한다. 같은 사물을 보면서,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찬란> 시집은 출,퇴근 길에 2일만에 읽었다. 다음에는 시 한 문장 한 문장 더 집중해가면서 읽고 속뜻도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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